'뉴스/정치/세계'에 해당되는 글 50건
- 2010.08.23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영화 인셉션 Inception 캠버전 자막
- 2009.03.03 대표적 MB악법으로 불리던 '미디어법'이 100일 뒤로 미루어졌다 한다.
- 2009.02.18 예상대로 합의이혼...대상그룹녀 임세령과 삼성전자전무 이재용 상대 이혼 소송 ‘취하’
- 2009.02.18 김수환 추기경 선종, 언제나 북한 동포를 생각...
- 2009.02.13 용산참사 물타기에 청와대 적극개입 ‘연쇄살인 홍보지침’ 논란 확산
- 2009.02.13 [오바마 시대와 한국]⑫킹 목사,찬사 못지않게 부정적인 평가도
- 2009.02.13 결혼 11년만에 이혼소송 맞은 이재용, 부인 임세령은 왜? 삼성그룹과 대상그룹 갈라서나?
- 2009.02.10 [오바마 시대와 한국] ⑩음모설 도는 말콤 엑스의 죽음, 오바마 암살의 위험 이겨내야
- 2009.02.10 편파수사 정치검찰 경찰에 면죄부,김석기 자진사퇴, ‘용산 의혹’ 잠재울까? [아침신문 솎아보기]
- 2009.02.09 김연아 갈라쇼에 네티즌들 "정말 대단해요" "블로그가 썰렁?"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화 인셉션 Inception 캠버전 자막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자막을 찾고,
또 일부에서는 그 것을 이용해 낚시를 하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중간 중간 자막이 사라지는 점은 있지만 싱크도 잘 맞고
전체적 흐름이나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는 듯합니다.
그래서 한글자막과 영문자막을 함께 올립니다.
첨부화일 받으시면 됩니다.
한글자막 =>Inception.2010.TS.XVID-k.smi
영문자막 =>Inception.2010 Ts.Xvid-e.smi
자막파일의 화일면을 고쳐서 싱크해 보시면 됩니다.
네이버에 올린 것이라서 티스토리나 다음에서는 어쩔지 알 수 없으니
만약 위의 링크가 다운이 않되면 아래의 네이버 블로그 주소에서 직접 다운 받으세요.
http://blog.naver.com/mhdc/150092566778
인셉션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무자막].Inception.2010.TS.XVID-PrisM.avi
드림머신이라는 기계로 타인의 꿈과 접속해 생각을 빼낼 수 있는 미래사회.
‘돔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생각을 지키는 특수보안요원이면서 또한 최고의 실력으로 생각을 훔치는 도둑이다.
우연한 사고로 국제적인 수배자가 된 그는 기업간의 전쟁 덕에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임무는 머릿속의 정보를 훔쳐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시켜야 하는 것!
그는 ‘인셉션’이라 불리는 이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최강의 팀을 조직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게임, 하지만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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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셉션'에서 결말은 토템이 돌아가는 모습입니다.
놀란감독은 우리의 무의식을 인셉션하여 끝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감독은 "당신은, 당신이 처한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 것은 아닐까?
에디뜨 삐아프 Non, Je Ne Regrette Rein (농! 쥬 느 허그레뜨 리엉) - 아뇨,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이 노래가 마지막에 다시 나옵니다.
감독이 관객들에게 킥을 차는 것 같습니다.
깨어나 현실로 돌아 가야 할 시간임을 알리는 것 처럼...
단순하면서도 난해 한 영화
'Inception'
[2010년 8월 23일 새벽 혼자만의 감동이 안타까워 한글 자막을 올리며 계룡도령 춘월]
대표적 MB악법으로 불리던 '미디어법'이 100일 뒤로 미루어졌다 한다.
그러면 나머지 법안들은 다 서민들을 위한 올바른 법인가?
야당은 왜 그렇게 쫒기듯 한나라당의 술수에 말려 든 것일까?
차라리 김형오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을 두고 보던지,
아니면 민주당 국회의원 총사퇴라는 강공으로 나가야 했지 않았을까?
이제 100일 후에는 그들의 억지에 무슨 카드로 대처하려는지...
그 동안 편파적인 일부 거대언론의 자가당착적인 기사가 쏱아 질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
자신의 안위 때문에 한치 앞을 내다 보지 못하는 야당 정치인들이여~~~
집권세력들의 영구집권 고착화에 일조하는 우를 범하지 마라.
적당히 최선을 다한 척하는 모습으로 국민을 속이려 하지마라.
그대들이 믿을 곳이라고는 국민들 뿐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마라.
국민은 부자를 위한 정부와 한나라당, 그리고 MB악법을 죽음으로라도 반대하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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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임세령씨 합의이혼..소송 취하
예상대로 삼성그룹의 맏며느리인 임세령(32)씨가 이재용 삼성전자(41)전무에 대해 제기했던 이혼소송을 취하했다.
서로간의 원만한 합의로 법정에 서지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임세령씨 소송대리인측인 법무법인 남산 관계자는 18일 “두 사람이 원만히 합의 이혼하기로 했다”며 “임씨가 이재용 전무를 상대로 제기한 이혼소송을 취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재벌들의 속성상 감출 것이 많은데...
서로가 법정에 서게되면 알려져서는 않될[?] 일들이 일부라도 밝혀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오늘[18일] 관련업계와 법조계 등에 따르면 임세령씨는 이재용 전무와 합의이혼하기로 결정하고 최근 제기했던 이혼소송을 취하했다고 각 언론에서 일제히 보도했다.
하지만 재산분할이나 자녀양육권 등 구체적인 합의내용에 대해선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1일 대상그룹의 장녀인 임세령씨가 삼성그룹의 황태자인 삼성전자 이 재용전무를 상대로 서울가정법원에 제기한 이혼 및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취하 한 것이다.
서울가정법원은 이 사건을 가사4부에 배당해 본격적인 심리 절차에 착수했었다.
이혼소송에서 임세령씨는 위자료 10억원과 수천억원의 재산분할을 청구하고,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는데 자녀양육권도 함께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된 삼성전자 이재용 전무는 지난 6일 미국시장 점검을 위해 출국한 이후 아직 귀국하지 않은 상황이며 미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한편 이번 소송취하와 관련 삼성그룹은 "이재용 전무의 개인적인 일인 만큼 그룹에서는 별다른 입장이 없다"고 밝혔다는데....
대상그룹 또한 "이혼에 합의한 것이 맞고 최대한 잡음없이 빨리 끝내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고 한다.
이혼의 이유는 이재용전무의 여성편력에 관한 소문들이 입방아질의 대상인데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더우기 삼성의 언론 막기는 세계최고 아닌가?
이제 이건희전회장의 퇴원 여부를 보면 더 깊은 내막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임세령[32]은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장녀이며 현재 대상그룹의 지주회사인 대상홀딩스 주식 19.9%를 보유하여 여동생에 이어 2대 주주이고, 임세령씨의 아버지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은 두 딸에게 주식을 상당수 증여하고 현재는 6.26% 만을 보유하여 3대 주주로 남아있다고 한다.
대상그룹 [大象─, Daesang Group] 어떤 회사일까?
대상은 바로 미원을 만들던 회사다.
고 이병철 선대회장은 "세상에서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은 세 가지 있는데 자식과 골프, 미원이다"라고 했을 정도의 시장 점유율을 가진 합성 조미료 제품이었다.
대상은 그밖에도 미원, 맛나, 감치미, 청정원 등의 브랜드를 가지고 있으며 1956년 1월 부산시 동래구에 동아화성공업(주)으로 출발하여 순수한 국내 발효기술을 기반으로 최초의 국산조미료 미원을 개발함으로써 우리 음식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
지금도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조미료의 대명사를 미원이라고 통칭할 정도이다.
대상은 미원에서 그룹의 주력사업인 종합식품업을 비롯하여 유통, 무역, 축산, 건설, 정보기술, 금융, 종합광고업 분야에 진출하고 있으며, 12개 계열회사와 재단법인 대상문화재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열사로는 모기업인 대상(주)을 비롯하여 대상홀딩스, 대상팜스코, 대상나드리화장품, 대상FNF, 동서산업(주), 계열회사에 대상사료(주), 대상농장(주), 대상식품(주), 대상유통(주), 대상수산(주), 미원(주), 대상하이디어(주), 대상정보기술(주), 상암기획(주), UTC벤쳐(주) 등이며 모기업인 대상주식회사 (Daesang Corporation)는 대한민국의 CJ와 버금가는 조미료 제조회사다.
현재 조미료외에도 햄, 소시지, 건강식품 등 모든 식품제품을 생산하고있다.
1956년에 설립되었으며, 1997년에는 현대 미원그룹에서 대상으로 변경되었으며, 본사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다고 한다.
또한, 대상문화재단에서는 불우청소년에 대한 장학금 지원을 비롯하여 학술연구비 지원, 문화예술단체 지원, 전통문화의 활성화 등 다양한 공익사업을 전개하여 복지증진 및 문화창달에 기여하고 있다.
1973년 국내 최초의 해외 플랜트수출로 기록되는 인도네시아 MSG 현지법인 설립을 계기로 활발한 해외사업을 전개하였고, 현재는 조미료·배합사료·요업·종합광고업 분야에서 20여 개의 현지법인과 해외사무소를 두고 MSG를 비롯하여 핵산, 아스파탐, 돈육 등 발효 및 축산관련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1997년 11월 상호를 대상으로 변경하고 새로운 CI작업을 완료하였으며, IMF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 외자유치 및 부실사업·한계사업에 대한 매각 및 합병 등 적극적인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단행함으로써 재무구조와 수익성을 대폭 개선하였다.
이재용-임세령씨 이혼 합의…소송 취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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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 2009-02-18 오후 04:0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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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 언제나 북한 동포를 생각하시던 김수환 추기경의 삶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金甫鉉)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조모(강말손)도 함께 체포됐으나 임신 중이어서 석방됐는데 감옥에서 풀려나 낳은 아기가 김수환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金永錫) 요셉이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아버지는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어머니 서중하(徐仲夏) 마르티나 역시 배우자의 믿음만 보고 가난한 집으로 시집 와서 거의 평생토록 옹기와 포목 행상으로 살림을 꾸렸다.
마음씨 착한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던 아버지는 소년 수환이 아직 어린 나이인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셨다. 성품이 곧고 거짓이나 불의와는 일체 타협할 줄 모르는 분이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밖에 나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며 더 엄하게 자식들을 키웠다.
3살 차이가 나는 형 김동한(金東漢) 신부와 어머니는 유년 시절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형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초등부 5, 6학년 과정)에 갈 때까지 서로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형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두 형제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어머니는 “너희 둘은 이다음에 커서 신부가 되거라”는 말씀을 꺼냈다.
“형과 내가 군위 보통학교에 다닐 때 한번은 어머니가 당신 친정이 있는 대구에 다녀오셨다. 짐작컨대 어머니는 거기 계시는 동안 성당에서 사제 서품의 장엄한 예식을 보고 오신 것 같다. 그때 어머니는 감명을 깊이 받으신 모양으로, 돌아오자마자 우리 둘에게 ‘너희는 이 다음에 신부가 되라’고 이르셨다.
형은 그 이듬해 대구에 있는 신학교 예비과로 옮겼고, 2년 후 나도 가게 되었는데 형은 기쁘게 갔으나 나는 그렇지를 않았다. 어머니의 명을 따라 갔을 뿐이다”(「샘이 깊은 물」1984).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
동성학교 시절 민족혼을 일깨우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면 울분이 치솟았다. 그래서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이 일로 학교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는데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의 명령을 받게 된다.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중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사제로 다시 태어나다
“과연 한평생을 착한 목자로 살 수 있을까? 장점보다 단점이 많은 내가 오히려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성찰하고 고백해야 할 것은 ‘하느님 저는 죄인이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결국 시편 51편에서 찾아낸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구절을 상본에 써넣었다.…
13살 나이에 어머니한테 등 떠밀려 소신학교에 들어가 30살에 사제가 되었다. 18년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회의를 여러 번 느꼈고, 신학교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꾀병을 내어 한 학기 건너뛰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한 길로 이끄셨다. 그 큰 섭리와 은혜에 엎드려 감사드렸다. 특히 어머니의 기도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해 69세이셨던 어머니는 ‘자식이 신부가 되는 게 소원’이었던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가슴 벅찬 순간을 맨 앞자리 마룻바닥에 꿇어앉은 채 지켜보고 계셨다. 그날 막내아들이 신부가 된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에서 기도와 눈물로 얼룩진 인고의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사제 수품 후 곧바로 안동성당(지금의 안동교구 목성동 주교좌성당) 주임신부, 1953년 4월 대구대교구장 비서, 1955년 6월 김천성당(지금의 대구대교구 황금동성당)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일선 본당신부 생활은 안동성당과 김천성당을 합쳐 3년이 채 안되지만 김 추기경은 이때를 ‘꿈처럼 아름다웠던 시절’로 회상하곤 했다.
교회의 새로운 바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56년에는 독일 뮌스터대학 유학길에 올라 은사이신 요셉 회프너 추기경을 만나게 된다. 김 추기경은 회프너 추기경에게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는데, 그리스도 사상에 기초한 인간관과 국가관 등을 정립하는 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무렵 광부와 간호사로 일자리를 찾아 독일에 건너온 한국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다.
한편 유학시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의 소식을 접하면서, 가톨릭교회가 문을 활짝 열어 새바람을 맞아들이고 쇄신을 통해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는 모습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공의회를 통해 자성하고 변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교회가 사회에 대해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체험은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훗날 주교와 추기경으로 소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귀국 후 1964년 6월 가톨릭시보사(지금의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가 한창 무르익던 시기로, 그는 다른 어떤 사제보다 먼저 시시각각으로 들어오는 공의회 관련 외신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세상을 위한 교회’가 되려면 종교 매체도 세상 사람들과 소통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던 그는 사회적 사건과 흐름을 신앙적 눈으로 조망하는 주제의 사설(社說)을 지면에 자주 실었다. 이 무렵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근본정신인 ‘변화와 쇄신’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한국 교회는 어떻게 변해야 하고 무엇을 쇄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창세기 12장 1-4절).
성무일도(聖務日禱)를 드리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부분을 묵상하던 1966년 3월 초순 어느 날이었다. 김수환 신부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는 소식을 듣는다. 44세의 젊은 나이였다.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着座式)은 1966년 5월 31일 완월동 성지여중고 교정에 열렸다. 김수환 주교가 사목표어로 택한 말씀은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이 문구를 훗날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할 때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고 해석을 조금 고쳐서 그대로 사용했다.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인의 삶이란 게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처럼 세상 사람들을 위해 나 자신을 온전히 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어떤 사람을 하찮은 존재로 무시할 때 ‘저 사람은 우리 밥이야!’라는 표현을 쓴다. 주님은 그 정도로 당신을 낮추고 비우면서까지 우리 밥이 되어 주셨다. 나 역시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바쳐서 모든 이에게 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정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표어대로 살지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초대 마산교구장으로 교구의 기초를 닦으면서 한시도 떠나지 않은 생각은 ‘어떻게 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대로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 최초의 시국 담화문 발표
김수환 주교는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대 사회적 발언을 한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서울대교구장 임명과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
1968년 4월 어느 날, 김수환 주교는 그의 표현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는다.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직을 맡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은퇴한 노기남 대주교에 이어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것이다.
마산교구의 초대교구장으로 주교직에 오른 지 2년밖에 안 된, 주교단에서도 제일 막내였기에 그의 머릿속에 맴돈 말은 ‘왜 하필 내가?’라는 반문뿐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서울대교구는 해결해야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는 상황이었다.
1968년 5월 29일 명동대성당에서 엄숙히 거행된 교구장 착좌식에서 김수환 대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는 짐이 얼마나 무거우며 또한 그것이 우리 교회를 위해 어떤 뜻이 있는가를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힘만으로는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착좌할 수 있는 것은 저를 이 자리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인도를 믿는 신앙심과 신자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 때문입니다. … 또한 제가 모든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때에 교회가 하느님의 장막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활로써 증거해달라’는 우리사회의 요구를 명심합시다”(명동대성당, 교구장 착좌식 1968. 5. 29).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양떼를 사랑한 목자
김수환 추기경이 교구장 생활을 한 30년 동안 교회는 발전을 거듭했다.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할 당시인 1968년 말 서울대교구의 규모는 본당 48개, 공소 63개, 신자 14만 명이었다. 30년 후인 1998년 말에는 본당 203개, 공소 6개, 신자 125만 명으로 크게 성장했다.
아울러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모시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다. 현재 국내외 원조사업과 백혈병 어린이돕기, 골수?제대혈기증, 장기기증, 국내입양운동 등의 사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
북녘 땅을 위한 기도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소외된 이들의 벗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그 믿음 때문에 추기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베풀었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추기경이 우선순위를 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서울대교구장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성탄 미사를 함께 드리기도 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사회와 개인을 구원하여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위한 싸움에서 미움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때문에 불의를 보고 분노하며 자신의 개인적 안락과 미래까지도 포기하면서 정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는 이들도 이 민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 민족 사회가 결코 미움과 대립의 사회가 되지 않고 사랑의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분들도 먼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9일 기도 메시지, 1986. 3. 9)
교회의 지도자이자, 사회의 큰 어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였다.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평생을 두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을 지배하는 큰 주제는 ‘인간’이었다.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존재를 바치는 모범을 보여준 스승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절대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른 항해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관심은 장애우. 나환우. 철거민. 도시빈민. 탈북주민. 외국인 노동자. 미혼모. 성매매 여성. 재소자 등 매우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김 추기경은 종교인들이 우리 사회의 인간화와 도덕성 회복, 사랑나눔을 위해 힘을 모아한다고 강조했다. 김 추기경이 1997년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해 축사를 한 인연으로 명동대성당 특강 강사로 법정(法頂)스님을 초청하기도 했고, 2005년 길상사에서 열린 석탄일 음악회의 수익금은 ‘성가정 입양원’에 전달되기도 했다. 2006년 소천(召天)한 강원용 목사와는 나이와 종교를 떠나 같은 곳을 향해 걸어온 도반(道伴)과도 같았다.
혜화동 할아버지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김 추기경은 정겨운 벗이자 착한 목자, 인자한 ‘혜화동 할아버지’로 넉넉한 웃음을 지닌 채 세상을 향한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두었다. 그는 이제 지상에서의 아름다운 여행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향기는 여전히 커다른 빛과 소금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하느님 곁으로
예나 지금이나 붉게 물들어 가는 저녁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이 편해진다. 고향 풍경과 어머니 품이 느껴진다. 어릴 때 저녁이 가까워 오면 신작로에서 서성거리며 행상 나간 어머니를 기다렸다. 내 나이도 이제 하느님 곁으로 한발짝 한발짝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면 보고싶은 어머니도 만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어 본다.
요즘 병세가 위독한 선후배 신부님들 병문안을 가면 귀에 바싹 대고 이런 말을 되풀이한다. “하느님한테 맡기세요. 하느님한테 모든 걸 다 맡기세요.”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요즘 병세가 위독한 선후배 신부님들 병문안을 가면 귀에 바싹 대고 이런 말을 되풀이한다. “하느님한테 맡기세요. 하느님한테 모든 걸 다 맡기세요.” 이는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평화방송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생각해보면 나는 죄인이다.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고개도 들 수 없는 대죄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오히려 이런 죄와 허물을 통해서-사도 바오로가 죄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리셨다(로마 5,20)고 하신대로- 당신의 사랑, 당신의 자비, 당신의 그 풍성한 용서의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셨다.
오, 펠릭스 꿀빠! (Oh, Felix Culpa! 오, 복된 탓이여!)
이제 나는 나를 이렇게까지 큰 은총으로 축복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 또 감사를 드리고 또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생이 얼마일지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진실로 하느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주교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대로 성체성사의 주님처럼 생명의 빵이 되는 삶, 모든 이의 '밥'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하느님 아버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나의 모든 걸 바쳐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주님께 영광 있으소서. 아멘. (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그 후](마지막회)인생을 돌아보며" 마지막 부분)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 약 력
1922년 5월 8일대구 출생(음력)
1933년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 입학(대구)
1941년 3월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등학교) 을조(乙組) 졸업
1941년 4월일본 조치(上智)대학교 입학
1944년 1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학업 중단
1947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편입
1951년 9월15일사제 수품, 안동성당(현 목성동성당) 주임
1953년 4월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
1955년~1956년김천성당(현 황금성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교장
1956년~1963년독일 유학, 뮌스터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전공
1964년~1966년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
1966년 5월31일주교 수품, 마산교구장 착좌
1968년 5월29일대주교 승품, 제12대 서울대교구장 착좌
1969년 4월28일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
1970년~1975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차 역임)
1975년~1998년평양교구장 서리 겸임
1981년~1987년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2차 역임)
1998년 5월 서울대교구장 및 평양교구장 서리 퇴임
▣ 상 훈
1970년 8월국민훈장 무궁화장
2000년 5월제13회 심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11월제2회 인제 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 1월대십자 공로 훈장(독일)
2002년11월베르나르도 오히긴스 대십자 훈장(칠레)
▣ 명예 박사 학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1977년 5월 노틀담대학교 명예 법학박사(미국)
1988년 11월 조치(上智)대학교 명예 신학박사(일본)
1990년 5월 고려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1990년 10월 시튼홀대학교 명예 법학박사(미국)
1994년 5월연세대학교 명예 신학박사
1995년 6월푸런(輔仁) 가톨릭대학교 명예 철학박사(타이완)
1997년 7월 아테네오대학교 명예 인문학박사(필리핀)
1999년 10월서울대학교 명예 철학박사
▣ 저 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지식산업사, 1981년, 구중서 편)
이 땅에 평화를(햇빛출판사, 1988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편)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사람과 사람사, 1994년, 신치구 편)
사회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 外 신앙 수상록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가톨릭출판사, 1998년, 천주교 서울대
교구)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사람과 사람사, 1999년, 신치구 편)
우리가 사랑한다는 것(사람과 사람사, 1999년, 신치구 편)
김수환 추기경 전집(가톨릭출판사, 2001년, 전집편찬위원회)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방송.평화신문, 2004년)(2009. 2. 16. 천
주교서울대교구 홈페이지에서)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김수환 추기경 선종
생전 약속한대로 각막 기증
《“여러분! 서로 사랑하며 사십시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자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 12분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 향년 87세. 세례명은 스테파노.》
서울대교구는 이날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이 사인이며 선종 때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백성호 비서신부는 “(김수환 추기경께서) 병실을 찾은 주위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했다. 돌아가시기 3, 4일 전부터 ‘과분하게 평생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고맙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며 추기경의 마지막 가르침을 전했다.
고인은 1922년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194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현 동성고)를 졸업한 뒤 같은 해 일본 도쿄 조치(上智)대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학병으로 징집됐다 일제가 패망한 뒤 귀국한 고인은 1951년 사제품을 받고 대구대교구 안동성당과 김천성당 주임 신부,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 대주교가 됐다.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에 서임됐을 당시 전 세계 추기경 136명 중 최연소였다.
1966년 주교품을 받으면서 사목표어로 설정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를 교회와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헌신했다.
1970년대에는 독재로 치닫던 박정희 정권의 위협 속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 잡았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회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개최했고 1998년 서울대교구장을 은퇴한 뒤에도 강연과 사회 활동을 통해 살아 있는 시대정신을 보여줬다.
정진석 추기경은 16일 메시지를 통해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항상 우리 사회의 큰어른으로 빛과 희망이 되어 주셨다”며 “평소 추기경께서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마음을 모아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을 애도하고 기도해 달라”고 밝혔다.
이날 고인이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 기증을 약속한 것에 따라 안구 각막 적출 시술이 이뤄진 뒤 유해는 서울 명동성당으로 운구됐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지며 유해는 가톨릭 관례에 따라 유리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는다. 20일 오전 10시 명동성당에서 정 추기경 주례의 장례미사가 열린다. 빈소는 명동성당이고, 장지는 경기 용인시 용인 천주교회 서울대교구 묘지다.
청와대 ‘연쇄살인 홍보지침’ 논란 확산 | |
경찰청에 “용산사태 대응위한 절호의 기회” 청 “공식적으로 보낸 바는 없다” 답변 애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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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홍보기획관실 행정관이 ‘용산 사태 확산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홍보하라’는 내용의 전자우편(이메일) 지침을 경찰청에 보냈다는 정황이 드러나면서, 청와대의 부적절한 여론호도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김유정 민주당 대변인은 12일 청와대 이아무개 행정관이 경찰청 홍보담당관 앞으로 보낸 이메일이라며 “용산 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 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란다”고 적힌 문건을 공개했다. 이 문건에는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 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언론이 경찰의 입만 바라보고 있는 실정이니 계속 기사거리를 제공해 촛불을 차단하는 데 만전을 기해주시기 바란다”고 적혀 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기자 브리핑에서 “공식적으로 보낸 바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비공식적 또는 개인적으로 보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해 경위를 알아보고 있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또 “보도된 내용을 보면 적극적으로 알리라는 (취지로), 홍보하시는 분들이 홍보하는 분들한테 보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런 답변은 청와대 차원의 조직적 개입 여부와 별개로, 최소한 홍보기획관실 행정관 차원에서 전자우편 지침을 보낸 사실 자체는 강력히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청와대는 이날 오후 대변인실 공식 입장을 통해 “거듭 말씀드리지만 청와대는 민주당 김유정 의원의 폭로와 같은 지침이나 공문을 경찰청에 내린 바 없다”고 밝혔다. 민주당이 문제의 전자우편 수신자라고 주장한 박병국 경찰청 홍보담당관은 “청와대로부터 군포 연쇄살인 사건 홍보와 관련해 공문이나 전자우편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사건 홍보는 경찰의 일상적인 홍보 지침에 따라 이뤄진 것이며, 청와대로부터 다른 지침을 받은 일이 없다”고 덧붙였다.
민주당은 이날 청와대의 조직적 개입 의혹을 제기하며 국회 차원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김유정 민주당 대변인은 “행정관 개인이 회의에 보고도 않은 채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며 “청와대 입장 변화를 지켜보면서 대응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안민석 민주당 원내부대표는 이날 국회 본회의 5분 발언을 통해 “국민의 죽음을 또다른 죽음으로 덮으려 한, 청와대의 ‘살인마 띄우기’는 단죄되어야 한다”며 “국회는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338447.html 강희철 황준범 길윤형 기자 jaybee@hani.co.kr |
군포 연쇄살인 취재에 유난히 친절했던 경찰 | |
,피의자 마스크 벗겨주고 식사·기자실 편의제공도 안양사건과 태도 대비적…경찰 “언론사 요청 따른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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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을 수사한 경찰은 여느 때와 달리, 언론에 유난히 친절(?)했다.
경기지방경찰청은 연쇄살인 피의자 강아무개(39)씨를 검거한 지 하루 만인 지난달 25일 그를 기자들 앞에 세웠다. 강씨는 이때만 해도 군포 여대생을 살해한 혐의만 인정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수사본부장은 강씨의 마스크를 벗길 것을 지시해 ‘흉악범’의 얼굴을 사실상 공개했다. 경기 안양에서 초등학교 여자 어린이 두 명을 유괴·살해한 뒤 주검을 끔찍하게 훼손했다가 지난해 3월 붙잡힌 정아무개(40)씨 사건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당시 여러 언론들이 흉악범 얼굴 공개를 요구했으나, 경찰은 ‘피의자 인권’을 내세우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경찰 스스로 채 1년도 안 돼 말을 뒤집은 것이다.
또 경찰은 지난 3일 “강씨가 자신이 저지른 범행을 책으로 내 아들이 인세라도 받게 하겠다는 특별한 진술을 했다”며 “자식에 대한 애정 표현으로 보인다”고 강씨의 심경까지 흘렸다. 수사 설명회 때 준비한 자료나 읽고 짧은 문답으로 끝내던 경찰의 평소 태도와는 대조적이었다. 이 때문에 취재기자들은 ‘군침’이 도는 내용이라면서도 뒷얘기를 풀어준 ‘호의’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경찰은 강씨 조사를 위해 프로파일러(범죄심리 분석관)와 함께 피의자의 마음을 어르는 ‘케어(care)팀’도 동원한다고 언론에 밝혔다. 경찰은 그동안 각종 수사에서 이들의 존재를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 이번엔 각종 매체에 이들의 출연을 주선해, ‘흥미진진한’ 생활과 수사기법까지 알려지도록 했다.
게다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구실을 한 것은 형사들이 현장에서 찾아낸 증거물의 유전자 감식 결과와 강씨의 자백이었는데도, ‘프로파일러의 심리분석 결과’라는 말을 써가며 사건을 드라마틱하게 엮은 보도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밖에 경찰은 현장 검증에 따라다니던 기자 100여명 등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하는가 하면, 널찍한 회의실을 기자실로 내주는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이와 달리 안양 초등생 사건 때는 경찰이 취재에 협조하지 않아 기자들이 경찰서 현관에 쪼그리고 앉아 보름 가까이 기사를 써야만 했다.
이에 대해 경기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중대한 사건이어서 취재진에게 신속하게 자료 등을 제공했다”며 “프로파일러나 강씨 신문 형사 등을 공개하고 기자회견을 주선한 것은 언론사들의 잇단 요청에 따른 것이지 어떤 의도나 지시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8443.html 수원/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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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혹스런 청와대 “홍보하는 분끼리 적극 알려라 한 것…” | |
‘청와대발 여론호도’ 문건 공개 전말 4일 의혹 입수, “제보” 확인에 국정원·경찰 허둥 11일 국회질문, ‘문건’ 묻자 한총리 “메일 알아보겠다” 11일 밤, 메일 발신·수신처·내용 드러나…청와대 당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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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홍보지침’ 파문은 지난 4일 김유정 민주당 의원실에 울린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김 의원 쪽이 “대단히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전한 제보자는 “청와대가 경찰청에 전한 지시”라며 팩스 한 장을 밀어넣었다.
팩스에선 용산 참사 등으로 생긴 부정적 여론의 물길을 틀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 내용을 적극 홍보하라”는 뜻밖의 내용들이 까맣게 찍혀 들어왔다.
김 의원은 사실일까 의구심을 품었다고 한다. 김 의원은 “제보자가 원본이나 사본을 보내준 게 아니라 원본 내용을 타이핑해 팩스로 보낸 것이어서 무책임한 야당의 의혹제기가 될까 많이 고민했다”고 말했다.
김 의원 쪽은 확인에 나섰다. 그런데 경찰과 국가정보원의 반응이 석연치 않았다. 김 의원 쪽은 “국회 긴급현안질문을 위해 경찰청 홍보담당관실에 자료를 4일 오후 6시까지 요청했는데 잘 주지 않았다”며 “그러다 6일께 단도직입적으로 ‘그럼 청와대에서 보낸 목록만 가져오라’고 했더니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갑자기 경찰과 국정원이 예민하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국정원 관계자가 김 의원에게 직접 전화하거나, 경찰 관계자가 의원실로 찾아와 “문건을 확보한 거냐” “이 내용을 (국무총리 등에게) 질의할 거냐”며 김 의원 쪽의 분위기를 엿보느라 바빠진 것이다.
김 의원은 “긴급현안질문 날짜가 가까이 오자 한 이틀 정도 경찰청 홍보담당관실쪽 연락이 되지 않다가 현안질문 전날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실에서 보내온 문건은 없다’는 짧은 답변만 왔다”고 말했다.
여전히 ‘긴가민가’하던 김 의원에게 ‘뭔가 있다’는 심증을 굳혀준 것은 11일 국회 긴급현안질문에서 나온 한승수 총리의 답변이었다. 한 총리는 김 의원의 물음에 “들은 바가 없다”고 부인하면서도 “청와대에서 무슨 메일이 갔는지 뭐가 갔는지는 모르지만 알아보도록 하겠다”며 묻지도 않은 ‘메일’을 언급했다. 김 의원은 ‘문건’이라고 말했는데 한 총리가 도리어 ‘메일’로 고쳐 답한 것이다. 김 의원은 “한 총리가 이메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봐서 (관련 내용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 의원의 의혹제기와 함께 이날 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가 문건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도하자, 청와대는 당혹스러워 했다. 당사자인 이아무개 행정관과 해당 비서관(김철균 국민소통비서관)은 이날 언론의 전화를 피했다. 그런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면 떳떳이 나서서 관련 보도 내용 등을 정면으로 부정하면 되는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기자들의 확인 요청에 “공식적으로는 (문건을) 보낸 일이 없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행정관 개인이 사적으로 전자우편을 보낸 일도 없느냐’는 물음에는 “그걸 포함해 경위를 알아보고 있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일부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보면 홍보하는 분이 홍보하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알려라’고 얘기한 거니까…”라고 말했다. 이런 내용이 전달된 가능성을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 분위기가 엿보이는 발언인 셈이다.
논란이 지속되자 청와대는 대변인실 명의로 “김 의원의 폭로와 같은 지침이나 공문을 경찰청에 내린 바 없다. <오마이뉴스>가 입수했다는 ‘청와대 공문’은 청와대가 사용하는 공문이나 이메일 양식과도 다르다”는 내용의 해명자료를 냈다. 공식적으로 공문을 내려보낸 적이 없다는 점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날 오후 늦게까지도 ‘행정관이 사적으로 전자우편을 보냈는지를 포함한 경위를 알아본 결과’를 속시원히 발표하지 않았다.
송호진 황준범 기자 dmzsong@hani.co.kr
[한겨레 관련기사]
▶ 청와대 곤혹 “홍보하는 분끼리 적극 알려라 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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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도 표절의혹 | ||||||||||
[오바마 시대와 한국]⑫킹 목사,찬사 못지않게 부정적인 평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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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버지 마틴 루터 킹 1세는 침례교 목사였다. 열다섯 살 때 모어하우스칼리지에 입학해서 사회학 학사학위를 받은 킹 2세는 펜실베이니아주의 체스터에 있는 크로저신학교를 마치고 1955년 보스턴대학교에서 조직신학 전공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킹은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어서 여기에 새삼스럽게 소개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대다수 미국인들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에 관해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이 많으므로 그 이력을 다시 짚어보는 것이 좋겠다. 특히 버락 오바마와 연관해서 킹을 논할 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흑인으로선 특출한 엘리트 코스 밟아 킹 목사, 생시와 사후에 받은 훈장과 명예는 산더미 이런 킹을 왜 ‘오바마시대’에 다시 조명해야 하는지를 지금부터 여러 사실들을 바탕으로 알아보자. 내가 이번에 킹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하면서 놀란 까닭은 부정적인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이었다. 살아 생전과 사후에도 킹 괴롭힌 것은 표절 무엇보다도 먼저, 킹이 살아 있던 때에도 사후에도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표절’이었다. 다소 길지만 <위키피디아>의 ‘마틴 루터 킹 2세의 저작권 문제들’ 중 주요 부분을 여기 옮겨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겠다. 마틴 루터 킹 박사의 논문들이 그의 부인 코레타 스콧 킹에 의해 스탠포드대학교의 ‘킹 논문 프로젝트’에 기증되었다. 1980년대 말, 그 논문들을 분류해서 목록을 작성하던 프로젝트 담당자들은 킹의 보스턴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인 ‘폴 틸리히와 넬슨 위먼의 신 개념 비교’가 보스턴대에서 3년 전에 다른 학생(잭 부저)이 쓴 학위논문에 담긴 많은 부문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 주요 신문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한 해 넘게 보도를 하지 않았다. <위키피디아>의 글은 이렇게 계속된다. 이 사건은 1989년 12월 3일자 (영국의) <데일리 텔리그래프>에 프랭크 존슨의 기명기사로 보도되었는데, 제목은 ‘마틴 루터 킹-그는 표절꾼이었는가?’였다. 그 다음 1990년 11월 9일,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이 ‘킹 연구자들, 실망스럽게도 골치 아픈 패턴을 발견하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보스턴 글로브>와 <뉴욕 타임스>를 포함한 다른 신문들도 비슷한 내용의 보도를 했다. 많은 신문 사설들은 킹이 그런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위대한 사람이라면서 그를 옹호했다. (···)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도 표절 의혹 여기서 독자들은 무엇을 연상할까? 바로 우리나라에서 근래 몇 해 동안에 벌어진 일들일 것이다. 특히 정치인, 고위관리, 학자들이 표절이 발각되어 더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총장이 되지 못한 사건들 말이다. 아마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마무리 구절이 아치발드 2세가 1952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한 연설과 부분적으로 비슷하다는 점이다. 두 연설 모두 새뮤얼 프랜시스 스미스의 인기있는 애국송가인 ‘나의 조국은 당신의 것입니다’의 첫 절을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며, 두 연설 모두 여러 산들 중 하나의 이름을 들면서 “자유여 울려 퍼져라”라고 노래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인용하고 보니 마틴 루터 킹의 이미지에 치명적 손상을 가하는 정보들을 소개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어쩌랴. 그의 표절 또는 저작권 침해가 이것들로 끝나지 않으니 말이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마틴 루터 킹 2세의 표절 페이지’(Martin Luther King Jr's Plagiarism page)가 나온다. 아직도 보완중이라는 이 페이지에는 킹의 ‘표절 조사 연대기’가 실려 있다. 인터넷엔 '마틴 루터 킹 2세의 표절 페이지'도 나와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크게 성장한 민권운동의 ‘대부’인 킹을 부정하면 많은 백인들의 지지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걱정도 컸을 것이다. 레이건도 아버지 부시도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도 하나가 되어, 킹의 표절이나 ‘문란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사생활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킹의 날’ 선포에 적극 찬동한 것은 그런 계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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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입력 : 2009-02-10 09:24:43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
결혼 11년만에 이혼소송 맞은 이재용, 부인 임세령은 왜?
12일 오후 이 건희전회장이 두통으로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에 입원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전해지자 삼성 측은 이 회장의 내원은 건강검진을 위한 것이라며, 이 전 회장의 건강 이상설을 일축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이건희 회장의 입원 소식이 전해진지 얼마 안돼 장남인 이재용(41) 삼성전자 전무가 부인인 임세령(32) 씨에게 이혼소송을 청구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삼성그룹가[家]가 흔들리고 있다.
이 건희(67)전회장은 지난해 경영 일선 퇴진에 이어 곧 이어질 삼성 특검 관련 대법원 재판도 남겨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삼성가[家]에 악재가 겹치고 있는 것이다.
삼성 측은 이 전 회장과 이혼 소송은 우연의 일치라며 이혼소송과 입원의 상관관계를 부인하지만 시간적인 연관관계나 이건희전회장의 언론회피 스타일을 감안하면 이 전 회장이 충격으로 입원했다는 소문이 힘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건희 전회장은 지난해 특검 등으로 11월 선친인 고 이병철 선대회장의 21주기 추모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이재용(41) 삼성전자 전무와 임세령(32) 부부는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부인인 임세령씨가 남편인 이재용을 상대로 이혼 및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과 10억원의 위자료, 그리고 5000억원 상당의 재산분할 청구소송을 서울가정법원에 냈다고 한다.
재계 전문 사이트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해 9월11일 현재 이 전무의 재산은 1조187억원이었다.
또 같은 사이트가 지난해 6월말 조사해 공개한 비상장 회사 주식 보유 현황에 따르면 이 전무는 삼성에버랜드 25.10%, 삼성SDS 9.14%, 삼성투자신탁운용 7.72%, 삼성네트웍스 7.64%, 서울통신기술 46.06%, 가치네트 36.69% 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재용 전무가 보유한 삼성 계열사 주식은 비상장사를 포함하고 있어 정확한 가치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조원을 훨씬 상회할 것이라는 것이 보편적인 전망이다.
다시 말해 임씨는 이전무의 재산 가운데 절반을 청구한 셈이다.
이로 인해 임씨의 재산분할 청구는 국내 최대 규모로 기록될 전망이다.
통상 일반인들의 이혼소송에서 재산분할은 결혼이후 형성된 재산의 50%까지 이지만 재벌가의 경우 20%의 재산분할 청구소송이 일반화해 있다고 한다.
임씨가 이혼소송을 제기한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결혼 후 임씨는 외부활동 없이 내조에만 전념해 왔다고 하는데 갑작스런 이혼 청구의 배경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최근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사전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진 삼성으로서는 이재용 전무의 경영 승계와 아울러 이후 혈연에 따른 경영 승계 문제 역시 향후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한편, 삼성과 대상 간의 혼사와 파경이른 배경 역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두 사람은 지난 1998년 6월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정원에서 영남 출신 기업과 호남 출신 기업간의 결합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결혼했었다.
임씨는 임창옥(60)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로 당시 이대 중퇴까지 하면서 이재용과 결혼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삼성과 대상의 혼사인데다 한때 ‘미풍’과 ‘미원’으로 조미료 전쟁을 벌였던 기업이 사돈을 맺었다는 점에서 재계는 물론 세간의 화제가 됐는데
고 이병철 선대회장 시절 제일제당은 대상그룹의 조미료 브랜드 '미원'을 넘기위해 '미풍'과 '다시다'를 출시하며 경쟁을 벌이는 등 양사의 경쟁이 치열했었다.고 이병철 선대회장은 "세상에서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은 세 가지 있는데 자식과 골프, 미원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지역적 차이와 조미료 분야에서 경쟁관계였던 양가의 혼사는 당시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이재용 부부가 11년만에 이혼소송으로 치닫으며 결국 양측 재벌가의 관계도 파경을 맞을 전망이다.
이번 이혼소송에 대해 임 씨의 변호인은 “소송을 낸 사실은 맞다. 하지만 가사 소송의 성격상 소송 내용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했고 삼성 관계자 역시 "이 전무의 부인이 이혼소송을 낸 것은 사실이지만 소송을 제기한 이유와 내용 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며 "개인사인만큼 회사 차원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전했다.
삼성 측은 개인사인 만큼 회사 차원의 언급은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가정법원은 이 사건을 가사4부에 배당해 심리중이어서 이들 부부는 조만간 법원에서 대면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전무는 지난 6일 애플 등 주요 거래선 경영자와의 면담 등을 위해 출국, 현재 미국에 체류중이고 부인 임씨는 연초부터 프랑스 파리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바마 암살의 위험 이겨내야 | |||||||||||||||||||
[오바마 시대와 한국] ⑩음모설 도는 말콤 엑스의 죽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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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에 비하면 말콤 엑스는, 어머니가 백인의 강간으로 태어난 ‘백인’이었다는 사실 말고는 철저히 흑인의 정체성을 가졌고, 흑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 목숨을 바친 사람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말콤, 너도 장래 직업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한다. 한 번 생각해본 적이 있니?” 이 짧은 대화가 말콤 엑스의 정규교육을 끝내버리는 ‘도끼질’이 된 것이었다. 아버지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어머니는 인사불성 상태로 병원에 갇혀 살고, 남매들은 풍비박산이 된 채, 소년원 생활을 하던 그는 8학년이 끝나는 날 학교를 그만두고 이복누나인 엘라가 사는 동부 매사추세츠의 보스턴으로 가는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탄다.
1945년 말 다시 보스턴으로 간 말콤은 패거리들과 함께, 부유한 백인 주택들을 털다가 이듬해 1월에 체포되어 8년 징역을 선고받고 매사추세츠주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의 자서전을 이 대목까지 읽어보면 동서양에서 나온 어떤 소설에 못지 않게 범죄 경력이 화려하고 다양하다. 나중에 흑인사회뿐 아니라 아프리카 민중운동 진영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 중 하나가 된 인물의 과거라고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감옥에서 말콤 엑스의 별명은 ‘사탄’이었다. 그가 종교를 적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옥살이 하면서 만난 ‘빔비’라는 흑인(독학으로 상당한 지식을 쌓은 무신론자)의 권유에 따라 ‘영어통신 코스’를 시작하고 ‘라틴어 통신강좌’까지 받으면서 말콤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이것이 그에게 찾아온 ‘작은 구원’이었다. 그는 ‘게걸스러운’ 독서광이 되어 감방의 불이 꺼진 뒤에도 복도에서 스며드는 불빛으로 새벽까지 책을 읽곤 했다. 1948년에 말콤 엑스에게 생애 최대의 ‘구원’이 찾아온다(이것이 나중에 그가 암살당하는 비극으로 이어진다고 추정되기는 하지만). 그의 형 필버트가‘이슬람 국가’(Nation of Islam, 약칭 NOI)를 소개하는 편지를 보낸 데서 그 구원은 시작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말콤의 여러 남매 중 손아래인 레지날드는 가장 열성적인 ‘전도사’였다. “형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담배를 끊으면 감옥에서 나오는 방법을 알려줄께”라는 그의 글을 보고 흥미를 느낀 말콤은 노포크 교도부락에서 옥살이 하던 기간 내내, ‘검은 이슬람교도들’(Black Muslims)의 지도자인 일라이자 무하마드(Elijah Muhammad, 1897~1975)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 일라이자 무하마드는 미국 흑인운동사에서 긍정과 부정 양면으로 아주 중요한(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마틴 루터 킹처럼) 인물이므로 여기서 간략히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조지아주 샌더스빌에서 태어난 그의 원래 이름은 일라이자 풀(Poole)이었다. 그는 말콤 엑스와 그 유명한 프로복서 무하마드 알리(원래 이름은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 그리고 루이 패러칸(Louis Farrakanh, 1933년생. 말콤 엑스의 영향을 받아 NOI에 들어가서 그의 부목사로 일하다가 말콤이 탈퇴한 뒤 NOI의 초대 대변인이 됨)의 종교적 스승이자 삶의 지표였다. 그는 침례교 목사의 아들이었으나 성인이 되자 미국 최초의 이슬람 단체에 들어가서 잠시 활동하다가 1934년에 NOI를 창시한 뒤 급격히 교세를 넓혀 강력한 흑인 지도자가 되었다. 1952년 가석방으로 출옥한 말콤 엑스는 디트로이트의 이슬람 제1사원에서 ‘위대한 스승’ 일라이자 무하마드를 만난다.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죄수인 나에게 시간을 내어 편지를 써준 그 위대한 알라신의 사도를 눈이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는 우리 흑인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 그의 생애를 고통과 희생으로 보낸 사람이라고 내가 들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가 말을 시작하자 나는 그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말콤 엑스> 상권, 319쪽) . 여기 이 고대의 성지, 아브라함과 마호멧 및 성서에 나오는 그밖의 모든 선지자들의 고향에서 피부색과 종족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것만큼 진지한 환대와 참된 형제애의 정신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지난 주일 동안 내내 나는 ‘온갖 피부색의 사람들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친절을 목격하고 완전히 말문이 막히고 넋을 잃을 정도였다 (<말콤 엑스> 하 권, 207쪽). 그는 이때부터 수니파(시아파와 함께 이슬람의 양대 교파)로 개종하면서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라는 아랍식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한다. “(···) 앞줄의 사나이 세 명이 벌떡 일어서서 말콤 엑스를 겨냥하고 일시에 총을 쏘아댔어요. 그것은 마치 총살집행장면 같았어요.” 미국 경찰은 ‘검은 이슬람교도’ 세 명을 체포했는데, 당연히 ‘1급 살인’으로 사형을 당했어야 마땅한 그들은 20여년 남짓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났다. 그러나 말콤 엑스의 사후 지금까지 미국에서는 국가 정보기관이 암살에 간여했으리라는 주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장면을 다시 읽으면서 ‘해방공간’의 혼란기에 암살당한 백범 김구 선생과 몽양 여운형 선생을 연상했다.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도 생각났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2008년 미국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이기기를 은근히 바랐다. 부시를 반드시 눌러야 세계가 훨씬 더 편안해질 텐데, 오바마가 후보가 되면 인종주의자들과 극우보수세력의 암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아들 부시가 임기 8년 동안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목숨을 잃게 한 그 많은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부시의 길을 따를 가능성이 큰 존 매케인의 당선은 막아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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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입력 : 2009-02-06 19:16:31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
편파수사 정치검찰 경찰에 면죄부,김석기 자진사퇴, ‘용산 의혹’ 잠재울까? [아침신문 솎아보기]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경찰특공대 진압 과정에서 5명의 철거민과 1명의 경찰관이 숨을 거둔 사건인데 검찰은 경찰에 법적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검찰은 “아쉬운 점이 있다”고 밝혔다. 정부가 공권력의 힘을 믿고 시민의 의문과 분노를 잠재울 수 있을지는 생각해볼 일이다. 검찰의 이러한 수사결과 발표는 언론이 예상했던 결과였다. 언론이 예상한 다음 순서는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가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하는 결정이다. 언론 예상대로 흘러갈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누구도 납득시키기 어려운 수사결과를 내놓았지만 언론의 표정은 엇갈렸다. 날 선 비판으로 검찰의 수사결과를 비판한 언론도 있었지만 시민의 분노를 잠재우는데 초점을 맞춘 언론도 있었다. 다음은 10일자 주요 아침신문 1면 머리기사다. -경향신문 <‘용산참사' 경찰에 면죄부>
언론은 용산 참사와 관련한 검찰 수사결과 발표와 여권 지도부의 사태 수습 방안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결과는 언론이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고 있다. 한국일보는 1면 <검, 경찰에 면죄부 줬다>라는 기사에서 “‘용산 참사' 수사 결과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검찰은 참사로 이어진 화재의 원인을 농상자들이 투척한 시너와 화염병으로 결론짓고, 경찰의 과잉진압 책임에는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3면 <‘합동작전' 용역 처벌·경찰 무혐의…‘기묘한 결론'>이라는 기사에서 “9일 발표된 ‘용산 참사' 경찰 수사 결과는 ‘경찰 무죄, 철거민 유죄'라는 당초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면서 “수사 막판에 불거진 경찰과 용역업체 직원의 합동 작전은 용역직원은 형사 처벌하고 이를 보호해 준 경찰에겐 책임을 묻지 않는 ‘이상한 결론'이 나왔다”고 지적했다. 검찰 면죄부 수사 예상했던 언론
검찰의 이번 수사결과 발표는 의문을 해소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이 언론의 공통된 평가이다. 경찰 면죄부에 초점을 두다 보니 무리수를 뒀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일보는 3면 <검 “진압 아쉬운 점 있다”면서 경찰 책임 안물어>라는 기사에서 “검찰이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고 에둘러 표현했듯이 경찰의 진압작전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명백한 잘못도 밝혀졌다. 그러나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4면 <철거민 쪽엔 ‘과학수사’…경찰…용역 쪽엔 ‘진술 의존'>이라는 기사에서 “검찰은 수사기간 내내 철거민 쪽에 불리한 정황과 증거들은 선제적으로 내놓거나 이를 입증하려고 철저한 과학수사를 벌였다. 반면, 검찰과 용역업체 쪽에 불리한 내용은 정치권과 언론, 진상조사단이 의혹과 증거를 제기한 뒤에야 확인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김석기 자진사퇴 카드, 여론 잠재울까
여권은 김석기 내정자 자진사퇴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경찰은 법적 책임이 없다면서 경찰 수장이 물러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론의 반발을 무마할 카드가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조선일보는 3면 <그냥 덮어두기엔…‘김석기 불씨' 너무 뜨거웠다>는 기사에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가 자진사퇴하기로 함에 따라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으로 촉발된 정국의 불안이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여권이 끝내 김 청장 내정자를 안고 갔을 경우 예상됐던 용산사건의 폭발성은 크게 감소하게 됐다”고 전망했다. 중앙일보 "사퇴하지 않으면 대통령에게 부담 된다는 논리"
국민일보는 3면 <법적 책임 면죄부로 ‘퇴로 명분'>이라는 기사에서 “김 내정자의 자진 사퇴는 사실 용산 참사 발생 때부터 예견돼왔다”면서 “사퇴를 하지 않고 버틸 경우 여론 및 야당의 거센 반발로 인해 자칫 ‘제2의 촛불' 사태가 점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3면 <청 “경찰 혐의 벗었으니 명예퇴진 적기” 판단한 듯>이라는 기사에서 “용산 참사 문제는 사건 발생 20일 만에 일단 중요한 고비는 넘었다”고 보도했다. 김석기 내정자 사퇴로 조선일보가 예상한 것처럼 용산 사건의 폭발성은 감소하고, 동아일보가 예상한 것처럼 중요한 고비는 넘었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서울신문 "검찰 수사결과 당혹스럽고 실망스럽다"
검찰 수사결과 발표는 본질적인 의문을 그대로 남겨 놓았다. 용산 참사에 대한 철저한 진상규명은 처음부터 수사의 초점과 거리가 멀었다. 언론이 명백한 증거를 들이대면 그때 수사에 나서는 소극적인 모습은 검찰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뻔한 수사결과를 발표해놓고 여론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적절한 태도일까. 검찰의 이러한 모습이 가능한 이유는 일부 언론이 “이제 그만하면 됐다”는 측면 지원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용산 참사, 수사결과 넘어 수습의 지혜 모을 때"
국민일보는 <용산참사를 전화위복 계기 삼아야>라는 사설에서 “검찰 발표로 용산 참사에 대한 진상은 대부분 드러났다. 하지만 깔끔한 매듭은 아니었다”면서 “다행인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철거민 문제를 포함한 재개발 사업 전반에 걸쳐 법과 제도 정비를 강조했고, 오세훈 서울시장도 세입자 지위 회복, 분쟁 조정 공적기구 설치 등 세입자 배려 정책을 약속하고 있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일부 언론은 경찰 책임론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이다. 오히려 경찰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중앙일보는 <눈물과 불법 폭력, 악순환 고리를 끊자>라는 사설에서 “이번 사태는 불법·폭력시위를 하면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보고, 그 결과 불법이 재발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일대 전환점이 돼야 한다. 경찰이 소신을 갖고 법질서를 수호하게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향신문 "이번 수사는 야만의 극치…특검 도입 불가피"
여권이 김석기 자진사퇴를 내세우고, 일부 언론이 적당히 덮자는 분위기 조성에 나서고 있지만 용산 참사 논란이 쉽게 가라앉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겨레는 <이런 수사결과를 믿으라는 건가>라는 사설에서 “정확한 진상규명도, 중립적인 자세도, 법과 원칙도 찾을 길 없다. 대신 정치적 이해타산만 두드러진다”면서 “(대통령의 태도는) 국민 목숨을 아랑곳 않는 오만과 독선이고, ‘야만적인 법질서 의식'”이라고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용산 참사’ 수사결과, 기만이고 야만이다>라는 사설에서 “우리는 이번 수사가 국민 기만이고, 야만의 극치라고 본다”면서 “국회 국정조사나 특별검사제 도입이 불가피해진 까닭”이라고 주장했다.
검찰 면죄부 수사, 적당히 덮자는 언론
[아침신문 솎아보기] 김석기 자진사퇴, ‘용산 의혹’ 잠재울까
2009년 02월 10일 (화) 06:48:48
류정민 기자 (
dongack@mediatoday.co.kr)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박종철 사건은 비상식적인 수사결과 발표가 시작이었다. 9일 검찰의 ‘용산 참사’ 수사결과 발표를 둘러싼 논란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민일보 <김석기 내정자 오늘 사퇴>
-동아일보 <김석기 내정자 오늘 자진사퇴>
-서울신문 <실익없는 ‘성장률 공표'>
-세계일보 <“용산참사 농성자 공동책임 경찰 특공대 투입작전 적법”>
-조선일보 <경찰은 살리고, 김석기 떠나고>
-중앙일보 <김석기 청장 오늘 사퇴>
-한겨레 <철거민 20명 기소…검찰은 ‘혐의없음’>
-한국일보 <검, 경찰에 면죄부 줬다>
▲ 한국일보 2월10일자 1면.
한겨레 1면 <철거민 20명 기소…검찰은 ‘혐의없음'>이라는 기사에서 “경찰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한 처벌은 있어도, 철거민 다섯 사람의 죽음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면서 “서울중앙지검 수사본부(본부장 정병두 차장)는 9일 오전 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농성자 20명과 용역·철거업체 직원 7명 등 27명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찰에게 법적 책임은 없는 것으로 결론내렸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 한겨레 2월10일자 1면
국민일보는 4면 <경찰 준비덜된 진압작전 정당?>이라는 기사에서 “(검찰은)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을 비롯한 모든 경찰 작전·지휘 라인에 면죄부를 준 것”이라며 “진압 장비 등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작전을 감행한 것과 경찰 소방 호스로 물을 쏜 철거 용역업체 직원만 처벌하고, 이를 묵인한 경찰에는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편파 수사 아니냐는 지적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 조선일보 2월10일자 3면.
중앙일보는 3면 <법적 면죄부 받았지만…“국정운영 짐 된다” 자진사퇴 급선회>라는 기사에서 “조기 사퇴론은 ‘비록 법적인 책임은 없더라도 김 후보자가 도덕적 책임이나 포괄적 관리책임은 져야 한다. 사퇴하지 않고 버티면 이제 이 대통령에게 부담이 된다'는 논리였다”고 보도했다.
▲ 중앙일보 2월10일자 3면.
서울신문은 <철거민 유죄, 경찰 무죄로 결론난 용산수사>라는 사설에서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당혹스럽고 실망스럽다”면서 “공권력에 의한 시위진압 과정의 사망은 정당한 공무집행으로 생존을 위한 철거민들의 저항은 범죄 행위로 내몬 데 대해 국민들이 얼마나 납득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 서울신문 2월10일자 사설.
동아일보는 <용산 참사, 수사결과 넘어 수습의 지혜 모을 때>라는 사설에서 “정치권은 사회적 갈등을 확대 재생산해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 해선 안 된다. 민주당의 특검 수사 요구는 정략적이다. 정부와 정치권이 지금 할 일은 철거민과 영세 상인들의 피해를 줄일 합리적인 재개발 정책을 마련해 제2, 제3의 용산 사건을 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동아일보 2월10일자 사설.
조선일보는 사설 <‘용산' 책임은 철거민·경찰보다 정부·국회에 물어야>라는 사설에서 “경찰의 진압작전을 이번 사태의 직접 원인으로 보고 그 책임을 경찰에 물을 순 없다. 물론 경찰의 진압작전이 서툴렀던 것은 사실”이라며 “정부나 국회, 지자체 등이 나서 재개발 조합과 세입자들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주는 절차나 제도를 만들었다면 이번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경향신문 2월10일자 사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7126
최초입력 : 2009-02-10 06:48:48 최종수정 : 0000-00-00 00:00:00
김연아 갈라쇼에 네티즌들 "정말 대단해요" "블로그가 썰렁?"
김연아(19.고려대 입학예정)의 갈라쇼가 온라인 상에서 화제다.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 인기검색어 상위권으로 '김연아 갈라쇼' '갈라쇼'가 급등했으며, 관련 동영상을 찾는 사람들도 급증했다.
네티즌들은 "김연아 갈라쇼 너무 궁금하네요" "어디서 볼수 있나요"라며 궁금해 했다. 또 네티즌들은 또 블로그와 카페 등에서 "정말 대단해요" "인기 고공행진~대박" "(갈라쇼 보느라고)블로그가 썰렁하지 않을까요?"라며 많은 관심과 찬사를 보냈다.
김연아는 9일 오전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 콜리시움 실내빙상장에서 'ISU 4대륙피겨선수권대회' 갈라쇼에서 린다 에더의 '골드'를 배경음으로 환상적인 연기를 연출했다.
김연아는 여자싱글 선수로는 유일하게 앙코르를 받았고 '죽음의 무도'의 하이라이트로 갈라쇼를 마쳤다.
한편, 김연아의 갈라쇼는 9일 오후 6시 20분 SBS TV 를 통해 녹화방송됐다. (인터넷뉴스팀)
4대륙 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한 김연아는 9일(한국시간) 열린 갈라쇼에서도 관중들의 앙코르가 터져나올 정도로 화려함과 농익은 연기를 선사했다.
더 이상 '피겨요정'이기를 거부하는 '피겨퀸' 김연아의 황홀한 무대는 캐나다 밴쿠버 퍼시픽 콜리시움을 열광의 도가니로 흠뻑 빠져들게 했다.
김연아의 연기가 끝나가 1만 관중은 일제히 환호와 탄성을 질렀다.
이번 '4대륙 대회' 갈라쇼는 남자싱글, 여자싱글, 아이스댄싱, 페어 부문에서 총 4위까지의 성적을 기록한 선수들만 참가했다.
이중 에더의 '골드' 선율에 몸을 실은 김연아의 농익은 연기는 화려한 몸짓과 부드러운 몸놀림, 더블 악셀과 트리플 살코로 모든 점프를 완벽하게 표현했다.
고난이도의 이너바우어와 제자리 스핀의 눈을 뗄 수 없는 연기에 여자 피겨 선수 중 유일하게 앙코르를 연발시키는 박수를 끌어냈다.
관중들의 앙코르 요청에 김연아는 쇼트 프로그램의 '세헤라자데' 하이라이트 부분인 스케이트 풋워크와 제자리 스핀을 다시 보여줬음에도 김연아를 연호했다.
김연아는 오는 3월 23~29일까지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다시 우승에 도전할 예정이다.